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64년, 갈도침략과 이작도 전투 === 1364년에서는 고려의 북방에서 큰 일이 벌어졌는데, [[보현숙성황후|기황후]](奇皇后)의 후원을 받은 [[덕흥군]](德興君)과 [[최유]](崔濡)가 1만여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 온것. 이에 최영과 이성계 등의 장수들은 적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고려의 시선이 북방을 향해 있는 동안 왜구는 엄청난 기세로 침공해 오기 시작했다. 3월, 왜구는 200여척이라는 대규모 함선을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군]]인 갈도(葛島)에 정박 시켰다. 이후 하동, 고성, 사천, 김해, 밀성, 양주 등을 약탈한 것이다. 한편 경상도 뿐만 아니라 전라도 지역도 왜구의 압력을 받아 조운선이 출발을 하지 못할 정도였고, 이에 공민왕은 경기우도병마사(京畿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左都兵馬使) [[이선]](李善)이라는 두 명의 인물에게 현지로 가서 [[조운선]]을 호위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변광수와 이선이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은 전력은 '''교동(喬桐)·강화(江華)·동강(東江)·서강(西江)의 80여척.''' 먹고 살기도 바쁜 당시 고려의 실상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의 전력으로, 후대의 [[진포해전]] 등에서도 고려가 동원한 함선은 백여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규모가 아니었다. 이 대규모 군대를 지휘한 변광수와 이선은 대도(代島) 지역에 진입했다. 그때,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가 간신히 도망친 내포(內浦) 출신 사람은 왜구가 이작도(伊昨島)[*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해 있는 대이작도, 소이작도를 말한다.] 부근에 숨어 있으니 함부로 진격하면 큰일 난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이선 등은 이를 무시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요란하게 북을 치며 달려드는 고려 수군을 본 왜구는 함선 두어척으로 교전을 하다가, 짐짓 퇴각하는 연출을 보였다. 이에 고려 수군은 제대로 낚였는데, '''곧 왜구는 함선 50여척을 동원하여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고려 수군을 포위했다.''' 그러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얼마 안되는 장교들로는 사태 수습을 하지 못했다.''' 그 이후 일방적으로 공세를 퍼붓자 병마판관(兵馬判官) 이분손(李芬孫), 중랑장(中郞將) 이화상(李和尙) 등은 속절없이 전사하고 말았다. '''장교들까지 이렇게 당하자, 그 모습을 보고 멘붕한 병사들이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는''' [[막장]] 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일까지 벌어지는 판이었다.[* 당시 기록으로는 열에 8명, 9명이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혼란을 수습해야 할 최고 지휘관 변광수와 이선은 '''이를 구경만 하다 도망치기 시작했고,''' 사령관이 병사들을 버리고 도주하자 병사들은 '''"병마사께서 어찌해 군사를 버리고 퇴각하십니까? 그대로 머물러 나라를 위해 적을 쳐부숩시다!"''' 하고 절규했으나 변광수와 이선은 이를 무시하고 달아났고, 남은 병사들은 그대로 왜구의 칼날에 유린되었다. 이런 개막장 사태 속에 부사(副使) 박성룡(朴成龍)은 혼자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배를 노획 당하지 않고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는데, 워낙 미친듯이 싸운지라 박성룡은 몸의 여러 곳에 화살을 맞고 말았다. 또한 병마판관(兵馬判官) 전승원(全承遠)과 판관(判官) 김현(金鉉),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 등도 미친듯이 싸워, 왜구는 도주하는 함선을 추격하면서도 함부로 달려들지를 못했는데 그때 도주하는 고려군의 선박을 서쪽에서 나타난 왜선 2척이 막아세웠다. 이 절망적인 사태에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들마저 바다에 몸을 던졌으며, 전승원은 혼자서 싸우다가 창을 여러 번 맞고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간신히 헤엄을 쳐 밤에 작은 배에 다시 올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렇게 자신도 간신히 살아난 전승원은 마찬가지로 헤엄을 쳐 허우적대는 고려 병사가 뱃전을 잡고 있는것을 보았는데, 이 병사는 화살을 맞은데다 너무 지쳐 도저히 배에 올라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전승원은 이 병사를 직접 끄집어 배에 태운 후, 역시 직접 노를 지어 3일 간 바다를 헤맨 끝에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물겨운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변광수와 이선이 이끈 20석의 함선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함선들은 대부분 왜구에 당해 물귀신이 되었다. 이에 교동, 강화, 동강, 서강 등지에서 통곡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나, '''이런 대패를 당한 [[변광수]], [[이선]] 등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전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후 정계에 등장한 [[신돈]]은 [[변광수]]를 탄핵하여 강원도 삼척으로 유배 보냈다.] 이 처참한 패배는 당시 고려군의 막장스런 시스템이 원인이 있는데, 각 지방은 따로 놀고 이를 제어할 중앙은 완전히 망가졌으니 중앙에서 지방에 뭐라해도 중앙의 것을 뺏아먹지 못할망정 자기건 내어주기 싫은 지방은 들은 척만 척했고 가진 게 없으니 군대도 마찬가지로 약체화가 된 것이다. 각 지방의 토호에서 출발한 당시 문관들도 자신들의 것을 내놓기 싫어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했다. 원래 지방 토호였든, 원에게 붙어서 출세한 뒤에 지방의 토호가 되었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았다. 게다가 군을 지휘하는 총책임자는 주로 조정의 문관들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무관이 아니라 군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군대는 자기맘대로 지휘하고 싶었으니 더더욱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휘할 병마사는 비상시 출동이 필요할때 임명되는 임시직이다. 그러나 전투는 오랜 시간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 필요한데 임시 지휘관이 내려와 싸우게 되었으니…… '''막말로 왜구에게 수군 전술로 농락당한 셈.''' 그런 상황에서 고려 조정은 일전에 왜구를 상대로 꽤 활약을 보여준 김횡을 전라도 도순어사로 삼아 왜구를 막으라고 시켰는데, '''왜구를 막으라 시킨 김횡이 군량미 절반을 착복하고 여러 조운선의 세미를 자기 재산으로 빼돌리며, 과부를 겁탈하는''' 막장 짓만 저질렀다. 그런던 김횡은 내포(內浦)[* 지금의 충청남도의 예산군과 당진군 일대]에 조운선을 가지고 갔는데, 마침 거기서 왜구를 만나 병력 절반을 잃었다. 그래놓고는 '''조정에는 뇌물을 주고 되려 승전했다고 보고를 올렸고, 이에 공민왕은 김횡에게 궁궐의 술을 선물했다.'''[* 이후에 [[신돈]]의 일당이라고 하여 탄핵 당하고, 복직한 뒤 왜구를 막지 못해 처형당하고 사지가 찢겨졌다.] 즉, 밑의 말단 병사부터 위의 지휘관들까지 제대로 된 전투의지가 없었고 능력도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간혹 있다 하더라도 주위 환경이 맞지 않아 아무 의미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